고양이 비비기 (페로몬, 영역표시와 유대감, 실전에서의 판단)

 


저도 처음엔 그냥 고양이가 좋아서 달라붙는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집 앞에서 항상 저희를 반겨주던 비비라는 고양이를 떠올리면, 그 행동에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고양이가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행동, 알고 보면 냄새와 본능, 그리고 사회적 유대감이 한데 얽힌 복잡한 신호입니다.


비비와의 첫 만남, 그리고 그 행동의 배경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집 앞 골목에는 검은색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섞인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비비크림처럼 착 달라붙어 잘 비빈다고 해서 비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만난 지 얼마 됐느냐는 것도 따지지 않고 제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왜 이렇게 스스럼없이 달라붙는 건지 그때는 전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양이가 몸을 비비는 행동의 핵심은 페로몬(Pheromone)에 있습니다. 페로몬이란 고양이의 뺨, 이마, 턱 주변에 있는 냄새샘에서 분비되는 화학 신호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동물에게는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입니다. 비비가 저에게 달라붙던 것도 단순한 애교가 아니라 저를 자기 집단의 냄새로 덮어씌우는 일종의 등록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비비가 낯선 저에게도 비빈 것이 반드시 친근감의 표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와 비비는 행동을 애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실제로는 낯선 냄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탐색 행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비비에게 저는 그저 분석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합니다. 어쨌거나 그때의 그 만남 덕분에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페로몬이 만드는 영역표시와 유대감의 경계

지금은 제리와 자루, 두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자루를 관찰하면서 비비기 행동의 층위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 됐습니다. 자루는 주 양육자인 처제에게는 거의 집착 수준으로 비비고 지나다니는 반면, 저에게는 아주 가끔, 그것도 아주 잠깐만 비비고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자루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는 알로마킹(Allomarking), 쉽게 말해 자신의 냄새를 상대에게 묻혀 같은 집단임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또 하나는 알로러빙(Allorubbing)으로, 이는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긴장을 해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자루가 처제에게 사정없이 비비는 건 영역 표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처제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에게 아주 가끔 비비는 건, 그렇다면 저를 아예 배제한 게 아니라 나름 인정은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고양이가 눈을 반쯤 감고 느릿느릿 비비는 행동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태는 고양이가 완전히 경계를 내려놓은 신호입니다. 얼굴과 머리를 드러내며 비비는 행동은 사실 고양이를 취약한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대에게만 보이는 행동입니다. 자루가 처제 앞에서 보이는 그 행동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고양이의 사회적 행동과 페로몬 소통에 관한 연구(출처: PubMed Central)에서도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이 단순한 반사 행동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의사소통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저와 아내는 자루를 관찰하면서 비비기 행동 외에도 다른 신호들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가오는지,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지, 옆구리를 붙여오는지가 같이 보이면 그건 확실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반대로 귀를 뒤로 젖히거나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비비는 건 다른 이유일 수 있습니다. 비비기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걸 직접 겪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비비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실전에서의 판단

고양이가 비비기 행동을 보일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은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갈립니다. 무조건 받아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특히 타이밍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루가 밥 시간 직전에 저에게 달라붙어 비비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드디어 나를 좋아하게 됐나 싶었는데, 그 직후 밥그릇 앞에 가서 앉는 패턴을 몇 번 확인하고 나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고양이는 비비기 행동이 먹이나 관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학습하면, 이 행동을 전략적으로 반복합니다. 조건화(Conditioning)라고 하는데, 이는 특정 행동과 결과 사이의 연결 고리를 학습하는 과정입니다. 진정한 애정 표현과 밥 요구의 차이를 구분하려면 타이밍, 신체 언어, 이후 행동을 함께 봐야 합니다.

비비기 행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고양이가 눈을 반쯤 감고 천천히 비빈다면, 방해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줍니다. 주도권은 고양이에게 있습니다.
  2. 비빈 직후 밥그릇 앞에 앉거나 특정 장소로 이동한다면, 밥이나 관심을 요청하는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물건에 비비는 경우, 친근감이 아닌 탐색 행동일 수 있으므로 무리하게 상호작용을 유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4. 갑자기 벽이나 바닥에 격렬하게 비비거나, 비빈 부위에 탈모가 생긴다면 피부 질환, 귀 감염, 알레르기 등 건강 문제를 의심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만 머릿속에 넣어두면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을 꽤 정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고양이 행동 연구 기관인 인터내셔널 캣 케어(International Cat Care)에서도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이 단순히 냄새 묻히기가 아니라 사회적 신호의 일환임을 설명하며, 맥락을 통한 해석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건, 과도한 비비기는 무조건 애정의 표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성화되지 않은 암컷 고양이의 경우 발정기에 비비기 행동이 증가하는데, 이건 번식 본능과 연관된 완전히 다른 신호입니다. 이 경우에는 수의사와 상담하는 것이 맞습니다. 비비기라는 행동 하나에도 이렇게 여러 층이 있다는 게, 고양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더 실감이 납니다.

비비라는 고양이와의 짧은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 자루의 행동을 이렇게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고양이의 비비기 행동은 단순히 귀엽다고 넘길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신호를 읽으려는 시도가 쌓일수록 고양이와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고양이가 다가와 비빌 때, 한 번쯤 타이밍과 눈빛과 꼬리 모양을 함께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 참고: https://www.therefinedfeline.com/why-do-cats-rub-against-you/?srsltid=AfmBOoo3xMfPrIar-NKJNLIfhbx4hzHN5eO_adLzlxvTzuz7V7Ra5FQ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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